[BOOK] <소설 보다 : 겨울 2022> | 김채원, 빛 가운데 걷기

 

단 돈 3500원으로 교양을 쌓는 방법 .. 책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도전할 때 가장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단편소설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나는 (사실 단편소설은 거의 재미없거나, 뻔한 클리셰 범벅이라고 생각함) 대학교 들어와서 학회 활동을 하면서야 단편소설의 매력을 느꼈는데, 그래서 그 이후로 꾸준히 단편소설집을 읽는다. 소설 보다 가을은 놓쳤지만 여름은 삼. 올해엔 꼭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한 작품집에 3편, 한 작품당 거의 1200원 꼴이라서 더 좋다. 네이버 웹소설 쿠키 10개 충전할 돈으로, 교양 있게 현대문학 한 편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메리트고, 뒤에 작가와의 대화가 있어서 더 좋다. 완전 추천.

 

하루에 후루룩 읽기 아까워서 한 편을 먼저 읽었다. '툴러'에서 산 태그로 표시해 가면서, 글을 곱씹었다. 아래는 리뷰.

 

<빛 가운데 걷기> 김채원 작가. 

 

딸이 죽은 노인과, 엄마가 죽은 소년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해서는 노인과 손자의 이야기. 노인의 시점에서 글을 풀어나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글이 지어져 있다. 읽는 동안 이게 무슨 흐름인가? 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그리고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노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그렇구나. 하면서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책이다. 

 

중간중간 좋은 표현들이 나온다. 두고 두고 읽고 싶어서 저장해뒀다. 노인의 딸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손자는 엄마의 죽음을 개의치 않는 듯 하다. 어려서 그런 걸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 책을 넘기다 보면 소년이 언어치료를 받는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노인은 그것을 대단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남들은 그것을 큰 문제라고 여긴다. 친구들을 때리고, 자전거로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그리고는 소음에 귀를 막는다.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결국 멀쩡하게 보이던, 멀쩡하게 살아가던 외면 속에 숨겨진 상처받은 내면이 드러난다. 노인이라고 상처가 없을리는 없다. 하지만 노인은 소년을 지켜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노인보다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 쓰고 있다. 노인이 바라보는 소년은 '극복 가능한' 미래가 창창한 사람이지만, 정작 본인의 이야기는 일상 말고는 적지 않는다.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소년과 노인이 살아가는 삶은 제3자의 시선에서 보기엔 참 여유롭고 느긋해 보인다. 그래서 부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점에서 본다면 나름의 치열한 삶일 것이다. 본인과 남의 시선이 비교된다 이것 또한 작가의 연출 아닐까. 노인은 소년에게 간식을 주고, 살구 두 알을 먹는다. 남에게 날아온 반송 불요의 엽서를 보고서는 햄버거의 맛이 궁금하다며 햄버거를 먹는다. 그리고 나름 만족한다. 하지만 자극적인 탄산음료는 이빨이 아파 먹지 못한다. 그리고 무릎이 아프다. 무릎이 아프지만 배터리를 사러 간 노인은, '그날의 운세'에 대한 내기를 하고 뜬금없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얻는다. 고물이지만 노인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배터리와 바꿔준다고 해도 마다한다. 이미 그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이 아파 병원을 찾았던 노인은 건강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하던 운동을 계속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듣지만, 정작 본인은 그 운동이 무엇인지 잊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다. 

 

자살한 사람의 뒤에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남겨진다는 말은, 결국 기약 없는 이별을 '당한'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려 보면, 기약이 있다는 것은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과 남겨지는 것은 결국 다르다. 남겨진 소년과 노인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설명 중 차기작에서 '소년'의 시선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 인상깊었다. 그래서 그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 소년이 작품 초입에서, 받아쓰기와 토마토 화분 중 하나도 노인에게 들게 부탁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단. 노인은 짐을 한쪽만 실으면, 균형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에게 둘 다 들거나, 둘 다 놓을 것을 택한다. 그리고 소년은 스스로 둘 다 든다. 받아쓰기는 엄마에 대한 추억, 토마토 화분은 노인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고 한다. 소년은 결국 둘 다를 들고, 과거와 현재의 인물에게 균형을 맞추고 걷는다. 평화롭게 느껴진다. 

 

소년의 언어치료 과정에서 '모자'로 문장을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소년은 이 단어를 발음하지 못한다. 노인은 괜스레 소년의 편을 들으며 '물'같은 단어였다면 더욱 쉬웠을 것이라고 투덜댄다. 작가의 말에서는 '모자'라는 단어를 소년이 몰라도 괜찮다, 등의 이야기만 풀어 나가서 내가 생각한 뇌피셜과 조금 달랐지만, 나는 읽으면서 '모자'라는 단어가 단순히 해를 가려주는 의상의 일부가 아닌,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단어인 '모자'라서 소년이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암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작가님한테 기회가 된다면 꼭 물어봐야지. 짧은 소설은 그 소설만의 임팩트가 있고, 함축성이 있어서 작가의 말을 읽는 게 더 재밌다.